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노버 왕국 (문단 편집) ==== 동군연합 해체 ==== 초기 [[하노버 왕조]]의 왕들은 영국보다 고향인 하노버에 관심이 많았으나, 영국 태생의 왕들이 즉위하고 영국의 [[국력]]이 크게 신장되면서 점차 하노버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게 된다. [[조지 4세]](게오르크 4세)는 하노버에서 하노버 왕으로서의 즉위식을 따로 가졌지만, 동생 [[윌리엄 4세]](빌헬름 4세)는 하노버를 방문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1815년부터 [[1837년]]까지 [[조지 3세]]의 아들이자 조지 4세와 윌리엄 4세의 동생인 [[아돌푸스 프레드릭|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왕자가 하노버 부왕(副王, viceroy)으로 부임해서 대리 통치했다. [[1833년]] 영국법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헌법이 제정되면서 자유주의적인 통치가 시작되었다. [[1837년]] [[윌리엄 4세]]가 사망했다. 영국에서는 윌리엄 4세보다 먼저 사망한 남동생 [[에드워드 어거스터스|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1767~1820)의 외동딸 [[빅토리아 여왕|빅토리아]]가 여왕으로 즉위했지만, 하노버에서는 [[살리카법]]에 따라서 살아 있는 남동생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Ernst August I)[* 영어식으로는 어니스트 어거스티스 1세(Ernest Augustus I).]가 왕이 되면서, 영국과 하노버 사이의 동군연합은 해체되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는 자유주의 헌법을 폐지하였고,[* 그 여파로 [[https://ko.wikipedia.org/wiki/%EA%B4%B4%ED%8C%85%EA%B2%90_7%EA%B5%90%EC%88%98_%EC%82%AC%EA%B1%B4|괴팅겐 7교수]]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의 전제군주처럼 강압적으로 통치했다. 애초에 영국은 하노버를 국왕의 사유지로 여겼었고, 과거 [[브리튼 섬]]의 스코틀랜드처럼 합병대상으로 보지는 않았기에 하노버 왕국은 찬밥 신세였으며, 조지 3세 시절 윌리엄 대(大) 피트 총리가 대놓고 하노버는 국왕의 이해관계에 있는 땅일 뿐 영국의 이해관계와는 무관하다며 거의 버리다시피 했을 정도였다. 당시 빡친 조지 3세가 그를 해임하기도 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계는 하노버를 암묵적으로 배제하려고 했었다. 한때 하노버가 영국의 대륙 상업 교역지로서 영국 국익에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19세기]]에 이것은 이미 옛날 이야기였다. 영국의 국력이 [[초강대국]] 수준으로 성장하고 영국 속령이 전세계 면적의 4분의 1을 점해 고립주의를 고수하는 영국의 세계 전략 상에서는 하노버는 그다지 쓸모 없었고, 오히려 대륙의 분쟁에 휘말려들 빌미를 줄 수 있는 부담으로 작용하는 지역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앨버트 공]]은 프로이센 위주의 소독일주의 통일을 지지하는 편이었기에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빌헬름 왕세제]]의 맏아들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왕자]][* 훗날의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에게 자신의 맏딸 [[빅토리아 애들레이드 메리 루이자|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를 시집보낼 정도였다.~~전 왕조 흔적 지우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